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 (문단 편집) ==== 독일의 통일을 이끌다 ==== 프로이센 왕국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맡은 난관은 [[징병제]] 기간 연장과 [[육군]] 조직 개편이었다. 명목은 [[세금]] 내는 [[부르주아]]들이 세금 내기 싫어서 반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 육군 편제는 [[1815년]] 해방 전쟁 시기 편제와 동일하게 15만명에 불과했는데, [[19세기]]는 [[인구]]가 폭증한데다가 , [[1848년 혁명]] 진압 시 드러났듯이 군부에서 인원 부족을 호소했고, 군인을 늘릴 필요성은 [[부르주아]]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부르주아들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예비군[* 현역 복무 후 4년간 예비군이었으며 제대 후엔 란트베어(지역방위군)으로 5년간 편성되었다.] 지휘관을 현역 프로이센 [[장교]]가 지휘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라 [[권위주의]]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것인데다가, 현역 장교가 유사 시 예비군을 지휘하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악용할 소지가 높아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군에서 융커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역 장교 직위는 접근하지 못했으나 예비역 장교 직위를 일정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보상으로 하사받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것으로 여겼다. 이런 국면에서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타협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마지 못한 척 다른 요구를 일부 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상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예 의회라는 제도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면서 의회 예산권은 무시하고 국가는 항시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의회의 [[예산]] 승인이 없어도 [[준예산]]으로 운영한다는 식으로[* 의회 초창기라 제도적 미비 탓도 있었다.]으로 밀어 붙여 버린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3.bp.blogspot.com/Werner+proclamation+versailles.jpg|width=100%]]}}} || || [[보불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 원래 비스마르크도 검은색 육군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빌헬름 1세의 [[어명]]'''으로 그림에서 통일의 주역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흰색 예복을 입은 것으로 그려졌다.] || [[빌헬름 1세]]를 도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헌법]]을 무시하는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제국]]이었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뜨리긴 했지만 당시 정치적 반대파인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등 가혹한 처벌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반동복고 전제 군주파였으나 강압적 수단에만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들을 엿먹이기 위해서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했으며 군비 확장 이후 비스마르크의 초기 [[외교]]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았다.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육군 수뇌부인 [[헬무트 폰 몰트케]]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정치 우위를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이라는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 육군 사령부들과 계속하여 갈등이 생겼으나 프로이센 육해군최고사령관인 빌헬름 1세의 신임을 이용해서 끝내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 ~ 1870년대의 외교 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제시한 보상책에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채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프랑스의 기대감을 이용했고,[* 당초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털길 바랐기 때문에 반대편에 붙을 일은 없었다.]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등을 이용하여 국내외 여론에 불을 붙여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1870년]])시키고, 독일 내에서는 물론 국제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그 결과 프랑스의 제 2제정은 패망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독일 연방에 남부 독일 국가들이 결합하여 독일 제국이 성립하여 중부유럽 강대국이 탄생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사의 중요 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상훈)|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온 것도 당시의 일이다.[* 19세기에 와서는 이 지역이 산업, 자원적으로 알짜기도 했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이 지역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부분이 더 궁금하면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유럽의 영토분쟁과 역사분쟁"을 참조.] [[백년전쟁]] 때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독일 지역의 제후령이었다. 그 후 17세기에 [[30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재점령했는데, 이백 년이 조금 지나 비스마르크 시대인 19세기들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이 다시 점령해 반 세기 정도 통치하다가 1차대전의 결과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경계에 있는 이 지역에 얽힌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경제통합, 나아가 유럽연합 구상의 기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